독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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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시간_도종환독서/시 2021. 9. 14. 07:39
종례시간_도종환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 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 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 주고 가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해 주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들도 그려 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분꽃에 입 맞추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고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질이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 먹이다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 하여 고추밭에서 노을 지는 하늘 쪽으로 날아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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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하여_정호승독서/시 2021. 9. 9. 08:01
결혼에 대하여_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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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헌책방_김현주독서/시 2021. 9. 8. 08:09
배다리 헌책방 김현주 당신은, 옛이야기 책 알록달록한 낡은 표지 속에서 아나, 곶감, 하면 아기울음소리 뚝, 그칠 것 같은 오래된 골목 방앗간 옆 헌책방 난전에 쭈그리고 앉아 읽던 장화홍련콩쥐팥쥐홍길동흥부놀부심청이와어린왕자피터팬백설공주고뇌하는햄릿과해와달이된젊은베르테르까지 해거름에 별책부록 같은 아버지 헛기침소리 별빛으로 붉게 쏟아지면 우르르 마중 나오던 골목의 신화들, 마지막 잎새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옛이야기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밑줄 친 영웅들을 몇 분 골라 바구니에 담고 있는 화수분 같은 골목은 오래 묵을수록 고전古典이 되고 경전經典이 된다. 시집 『유채꽃 광장의 증언』 2021. 문학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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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재-공광규독서/시 2021. 9. 5. 08:00
두문동재* 공광규 초여름 신록이 쪽물 들인 화선지다 야생화가 화선지 위에 점묘화를 그려놓았다 야생화의 양식은 산안개와 이슬일지도 쏟아지는 별똥별일지도 모른다 식물의 알뿌리를 파먹고 사는 멧돼지가 이곳저곳 땅을 들쑤셔놓고 갔다 이렇게 들쑤셔놓은 자리에서 다음 해 더 많은 야생화가 핀다고 한다 *두문동재(杜門洞峙)는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1,268m의 고개로, 싸리재라고도 하며 국도 제38호선 및 백두대간이 통과한다. 시집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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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_박노해독서/시 2021. 7. 23. 10:43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박노해 봄비를 맞으며 옥수수를 심었다. 알을 품은 비둘기랑 꿩들이 반쯤은 파먹고 그래도 옥수수 여린싹은 보란듯이 돋았다. 6월의 태양과 비를 먹은 옥수수가 돌아서면 자라더니 7월이 되자 내키보다 훌쩍 커지며 알이 굵어진다. 때를 만난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네 맑은 눈빛도 좋은 생각도 애타고 땀 흘리고 몸부림쳐온 일들도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시련과 응축의 날들을 걸어온 작고 높고 깊고 단단한 꿈들도 때를 만난 사람보다 강력한것은 없으니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네 눈물도 희망도 간절한 사랑도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박노해의 '숨고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