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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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_박두규독서/시 2021. 10. 2. 13:11
퇴직_박두규 33년 동안 물밑을 헤엄쳐 왔다 언젠가부터 나이 60이 되면 수면 위로 올라가 뭍에 첫발을 딛고 늘 꿈꾸던 하늘을 보며 오래 젖은 몸을 햇볕에 말리고 싶었다 잘 마른 한지처럼 바싯거리는 소리를 내며 책장 넘기는 기분을 한껏 내고 싶었고 가난한 어부의 함석지붕에 널려 있다가 어느 명절에 잘 쓰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한순간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를 듣고 싶었고 어머니의 젖을 물고 바라보았을 첫날의 경이로운 하늘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글을 처음 익힐 때처럼 책을 읽고 시를 처음 쓸 때처럼 펜을 잡고 싶었다 얼마나 더 이승의 밥그릇을 훔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한 세월이 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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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_기형도독서/시 2021. 9. 23. 05:09
노인들_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주)문학과지성사 1989.5.30. 26쇄 1999.3.25. 奇亨度, 1960.3.13. 경기 연평 ~ 1989.3.7. 종로구 낙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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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한가위_반기룡독서/시 2021. 9. 21. 13:25
팔월 한가위, 반기룡 길가에 풀어놓은 코스모스 반가이 영접하고 황금물결 일렁이는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며 그리움과 설레임이 밀물처럼 달려오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한동안 뜸했던 친구와 친지 친척 만나보고 모두가 어우러져 까르르 웃음 짓는 희망과 기쁨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그런 날이었으면 합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인심이 샘솟아 고향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지라도 슬며시 옛 추억과 동심을 불러내어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의미 있고 소중한 팔월 한가위이었으면 합니다 반기룡직업시인소속-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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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도 어울리는 계절 -방우달독서/시 2021. 9. 16. 10:47
울어도 어울리는 계절 -방우달 술을 많이 마시면 사철 어느 때든지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울 수 있습니다 가을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가을은 나를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울면서 돌아갈 운명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가을은 인간을 울게 하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울어도 수치스럽지 않은 계절입니다 겨울에 울면 가련해 보입니다 여름에 울면 어색해 보입니다 가을은 울기에 가정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뺨을 맞아도 괜찮은 계절입니다 -방우달 (시인) ·1994년 7월 월간 신인상(시)으로 등단 ·2000년 제3회 서울문예상 수상 · 등 시집 6권 발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