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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의 꿈_오탁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블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울어는 보고 싶다
연탄_이정록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식구_박제영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 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뿌리의 전언(傳言)_정선영 뿌리들이 땅 위로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뿌리가 그리는 말을 읽기 위해 걸음을 멈춘다 비틀리고 뒤틀리며 기묘한 그림을 그리는 나무 땅속 흙의 말을 뿌리로 적고 있다 무작정 산길을 걷다가 발목이 낚인다 긴 겨울 출렁다리를 건너온 뿌리의 강의를 듣는다 언어 저 너머에 놓인 것을 해독하기 위해서 멈춘다
별이 되다_최우영 어젯밤 내린 비가 아침을 맞아 나뭇잎 끝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아주 먼 거리에서도 빛을 맞아 반짝이는 우주의 별처럼 해의 빛을 담아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거리_황경신 당신과 나 사이에 바람이 있어야 당신과 나 사이로 바람이 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창문이 있어야 당신과 내가 눈빛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창밖에 서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나였으면 당신은 그저 다정한 불빛 아래서 행복해라 따뜻해라
그대 앞에 봄이 있다_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조용히 닻을 내리고
노근이 엄마_정호승 내 가장 친한 친구 노근이 엄마가 지하철역 남자 화장실 청소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오줌을 깨끗하게 눈다 단 한방울의 오줌도 변기 밖으로 흘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노근이 엄마가 원래 변기는 더러운게 아니다 사람이 변기를 더럽게 하는 거다 사람의 더러운 오줌을 모조리 다 받아주는 변기가 오히려 착하다 니는 변기처럼 그런 착한 사람이 되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